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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 서울아리랑페스티벌 - 서아페어워즈 - 서울아리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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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서울아리랑상Seoul Arirang Festival Awards
제3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The 3rd Seoul Arirang Award
  • 제3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The 3rd Seoul Arirang Award
  • 일시 : 2017년 10월 13일 (금) 19:00 (Date 7pm. Oct 13th, 2017)
  • 장소 : 광화문광장 축제무대 (Place Festival Main Stage in Gwanghwamun Square)

토월회를 조직하여 연극<아리랑 고개>를 통해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창조적 확산과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춘강 박승희 대표(1901~1964)가 제3회 서울아리랑상의 주인공으로 선정하였습니다.

The Seoul Arirang Award is given out to a person who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value and creative dissemination of Arirang. The recipient of the Seoul Arirang Award for 2017 is Park Seung-hui(1901~1964) who is the dramatist and director. He contributed to the creative expansion and popularization of Arirang through the play "Arirang Gogae". The Award Ceremony takes place as part of the opening ceremony of the Seoul Arirang Festival on October 13, 2017, at 7 pm.

서울아리랑상

제3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 : 춘강 박승희 대표

박승희 연혁

1901년
박정양의 셋째 아들로 출생
1919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1921년
메이지대학 영문과 입학
1922년
김기진, 이서구 등과 독서토론모임으로 토월회 조직
1923년
조선극장에서 박승희의 <길식> 등 창립공연
토월회를 전문극단으로 개편
1924년
박승희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등 전속극장 공연과 전국순회 공연
1926년
제56회 공연과 함께 토월회 해산
1928년
우미관에서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 등으로 토월회 재기 공연
1929년
조선극장에서 박승희의 <아리랑고개> 공연
1932년
토월회 명칭을 태양극장으로 개편하고 1940년까지 공연활동 지속
1946년
토월회를 재건하고 잠시 공연활동 후 해산
1963년
드라마센터 주관 제1회 한국연극상 수상
1964년
63세로 별세
1994년
9월에 문화체육부 주관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2017년
제3회 서울아리랑상 수상
서울아리랑상

조선극장 준공기사

박승희와 토월회
Park, Seung-Hui and Towolhoe

박승희는 1920년대 신극 활동을 시작해 우리나라 근대연극의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이다. 그가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일본 유학시절이다. 그는 구한말 초대 주미공사, 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박정양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은 신극운동이 한참 활발하던 시기이다. 박승희는 유학 기간 중 일본 문화계를 경험하면서 연극, 특히 신극에 빠져들었다. 귀국 후 신극운동을 하리라 뜻을 세운 그는 연극 공부에 매진했다. 뒷날 그는 유학 시절 신극 공연은 거의 빠짐없이 다 보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극단 토월회는 본래 박승희, 김기진, 이서구 등 민족의식을 지닌 몇몇 조선의 일본유학생들이 만든 독서토론회로 출발했다. 1년여 후 1923년 여름방학 때 귀국한 이들은 민족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연극을 해보자는 데 뜻을 모아 토월회를 극단으로 만들어 7월 4일 조선극장에서 창립공연을 했다. 그러나 창립공연에서 드러난 미숙함을 만회하기 위해 9월 1일 제2회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대중성을 고려해 <부활> 등 알려진 작품을 선택해 흥행성을 보완했고, 무대미술을 새롭게 하며 기존 연극계의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받았다.

제2회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박승희는 토월회를 전문극단으로 개편했다. 전문극단으로의 전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탈퇴했지만, 박승희는 인원을 보충하고 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이후 토월회는 1924년 1월부터 전속극장의 공연과 전국 순회공연 등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6년 4월 제56회 공연을 끝으로 해단하고 만다. 재정 악화와 극단 운영상의 갈등이 누적된 탓이다. 그 간 박승희는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 상당부분을 날려버렸다.

이후 박승희는 몇 차례 토월회의 재기를 도모했다. 1928년 10월 박승희의 원작 <이 대감 망할 대감> 등을 무대에 올리고 지방순회 공연을 했으나 신파극에 가깝다는 혹평을 들으며 곧 해산하고 말았고, 1929년 11월 역시 박승희 원작의 <아리랑고개> 등을 무대에 올려 좋은 평가를 받고 지방순회 공연을 했지만 극단 운영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 뒤 박승희는 1932년 토월회를 태양극장으로 개칭해 1940년까지 연극활동을 이어갔고, 해방 이후 1946년 토월회를 재건해 공연을 한 바 있으나 곧 해단하고 연극계를 떠났다. 그리고 1964년 7월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승희는 200여 편의 작품을 창작 및 번안, 각색해낸 극작가로, 그리고 180여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극단을 운영하여 신극계를 이끌어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6월 드라마센터 주관 제1회 한국연극상을 수상했다. 또한 문화체육부는 1994년 9월에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그의 업적을 기렸다.

강등학 강릉원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Park Seung-Hui is a pioneer who set the foundation of Korean modernist drama. Born as a son of former Korean minister to America and Prime Minister Park Jung-Yang, he studied at Seoul in his youth and went to Japan to study at Meiji University. At that time, modernist drama was spreading throughout the Japanese acting scene. During the time at Japan, he was fascinated by modernist drama and decided to introduce it to Korea.

Towolhoe, literally meaning Earth(Real world)-Moon(Utopia) Society, started in the form of debate forum, consisting of Korean students who studied at Japan. In 1923, about a year after the establishment, the members of Towolhoe sets its purpose to enlightening Korean people and changes its form into troupe. The first stage, played at July 4th, was not successful. They chose the already well-known title "Resurrection" for the next performance to appeal to the public, and refreshed the stage art. The stage work was highly acclaimed as to be "beyond average level" of that time.

After getting good reputation, Park Seung-Hui reorganized Towolhoe into a professional troupe. Many people who was against this decision left the Towolhoe, so he reinforced the members and reset the system at this time. Towolhoe remained active afterwards until its 56th stage in April, 1926. However, the troupe was suffering from accumulated deficit and finally was disbanded. Park Seung-Hui spent most of his money granted from parents on the troupe during the period.

Park tried to reestablish the troupe several times. He wrote several original scenarios for the troupe. In November 1929, his original plays including "Arirang Hill" received good ratings and started touring, but he couldn't maintain the troupe. In 1932, he renamed Towolhoe as "TaeYang Theatre" and managed to run the troupe until 1940. After the independence of Korea, he reestablished Towolhoe, just to be able to play only several stages, and then left Korean acting scene. Later, he died in July, 1964, at the age of 63.

Park Seung-Hui, as a scenario writer, wrote two-hundreds of scenarios, including his original, adaptation, and dramatization. As a director, he directed over 180 stages of drama. He was one of those who lead the modern Korean theatre scene with his continuous activities over time. In honor to his devotion, he won the first Korean Theatre Prize in June, 1963. Korean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selected him as 'Person of the Month in the field of culture' in September, 1994.

서울아리랑상

극단 토월회의 창립동인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승희, 이서구, 박승목, 김복진, 김팔봉, 김을한, 송재삼.
[동아일보 1978년 1월 1일]

연극 <아리랑고개>의 문화적 의미
The cultural meaning of 〈Arirang Hill〉

<아리랑고개>는 박승희 원작, 박진 연출로 1929년 11월 1일 조선극장에서 공연됐다. 이 작품은 박승희가 토월회의 재기에 1차 실패한 뒤 다시 토월회를 재건하기 위해 무대에 올린 것으로, 당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통해 토월회는 옛 명성을 되찾았고, 훗날 <아리랑고개>를 토월회의 대표작으로 꼽게 했다.

<아리랑고개>는 사랑하는 두 청춘, 봉이와 길용의 비극적 이별을 그렸다. 길용네가 일본인의 고리사채를 빌려 쓰다가 갚지 못하는 바람에 논밭을 지키지 못한 채 고향을 등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며 두 사람도 눈물로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연극을 보고 필명 S.H.로 <동아일보>에 기고한 한 칼럼은 “흉년이 들어 문전옥토를 그대로 남에게 빼앗기고 동리 권력가의 미움을 받아서 사랑하는 향토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당시 조선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했다. <아리랑고개>가 일제강점기 민족의 현실과 감성을 형상한 작품임을 말한 것이다.

논객들은 리얼리즘적 형상이 미흡하고, 감상적 분위기로 흐른 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아리랑고개>의 공연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토월회는 전국 순회공연을 했고, 그 때마다 <아리랑고개>를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아리랑고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곳곳의 지역문화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개성의 고려청년회가 1930년 12월 1일부터 3일간 개최한 아마추어들의 소인극(素人劇)대회에서 경연할 4종의 대본 중 하나로 박승희의 <아리랑고개>를 선정한 것을 보면 토월회의 <아리랑고개>가 지역 청년들의 연극운동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10월 1일 개봉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자극으로 연극계도 아리랑을 소재로 한 공연을 전국 여기저기에서 무대에 올렸다. 특히 1929년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 아리랑의 연극공연이 집중되는데, 일부 신파극단이나 지방극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연극운동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리는 소인극이었다. 그러므로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는 일제강점기 아리랑 소재 연극의 대표적 공연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극단의 영향력이나 극의 완성도에 있어서 여타 아리랑 연극공연이 전문극단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를 능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민요 아리랑 중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것은 ‘서울아리랑’뿐이다. ’서울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기존의 민요 아리랑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서울아리랑’이 유독 민족상징의 민요가 된 것은 그것이 일제강점기 민족의 시련을 그린 영화 <아리랑>을 배경으로 유행하면서 당시 민족의 감성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영화 <아리랑>처럼 <아리랑고개>도 당시 농촌 현실을 통해 민족의 시련을 그렸다. 영화 <아리랑>은 악덕지주 밑에 고생하는 소작인의 삶을 그렸고, <아리랑고개>는 일본 고리대금업자에 짓눌려 논밭을 잃는 농부의 삶을 그렸다. 그리고 <아리랑고개> 또한 ‘서울아리랑’을 삽입해 노래했다. 그러므로 영화 <아리랑>의 관객들이 일제에게 고통받는 민족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주제가 ‘서울아리랑’에 공감했던 것처럼 <아리랑고개>의 관객도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영화 <아리랑>의 영향으로 아리랑이 대중가요, 또는 시로 창작되고, 무용으로 형상되는 등의 문화현상이 일어났고, 아리랑의 연극활동도 그러한 현상의 일환에 해당한다. 그러나 연극은 서사와 함께 향수되기에 현실의 형상이 구체적이다. 그러므로 연극은 아리랑 소재 문화활동 가운데 영화 <아리랑>에 근접된 효과를 낼 수 있는 장르로 기능했다. <아리랑고개>가 영화 <아리랑>과 유사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고개>가 아리랑의 여러 문화활동 중 영화 <아리랑>이 빚어낸 아리랑의 성격화를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재생산해내는 데 다른 것 못지않게 영향을 크게 끼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랑은 민족성원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문화권력을 획득했다. 그것은 물론 영화 <아리랑>을 통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현재까지 아리랑의 문화적 지위가 유지되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의 성격을 재확인하고 재생산하는 문화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아리랑이 그 본질적 성격과 함께 당대의 문화적 의미를 새롭게 지니며 문화사를 전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아리랑의 문화권력을 현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아리랑고개>는 영화 <아리랑>으로 막 형성된 아리랑의 성격 유지와 확산의 초기 국면에 문화적 기여를 한 대표적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리랑고개>가 실상 ‘서울아리랑’의 위상 확립에 기여함이 있었음을 뜻한다.

서울아리랑상

춘강 박승희 기념비

"Arirang Hill", originally written by Park Seung-Hui, was first played at Joseon Theatre in November 1st, 1929, under the direction of Park Jin. Park Seung Hee wrote this scenario after failing the first attempt to re-establish Towolhoe. Towolhoe regained its reputation after the success of "Arirang Hill", and this one became one of the troupe's major work.

The story mainly goes along the tragic parting of two lovers, Bong-y and Gil-Yong. Gil-Yong gets a high-interest loan from a Japanese private moneylender, but can't pay back. Gil-Yong gives up his land and crops, and even his lover, Bong-y. As Gil-Yong climbs up the Arirang Hill, he says farewell to his hometown, and to his lover.

An article with the penname S.H. says Gil-Yong forfeiting the assets symbolizes the state of affairs of that time - Korea under the rule of Japan - well. Critics pointed out the sentimental and less-realistic part of the story, but gave a good point in terms of popularity. With these receptions, Towolhoe started a show on tour, playing "Arirang Hill" on stage every time. This tour made it possible for people across the country to watch the show, and "Arirang Hill" affected each regional cultures. Goryeo Young men's Association held an amateur play competition, and "Arirang Hill" was chosen as one of four attending scenarios. This shows how far the influence of "Arirang Hill" went.

In 1926, a movie "Arirang" by Na Woon-Gyu was released. This movie greatly inspires the acting scene and many troupes start to play Arirang-based scenarios all over the country. This trend is concentrated especially between 1929 and 1930, most of which having been played by amateurs. Considering the influence of troupe or completeness of the work, "Arirang Hill" is the most appropriate one to be called as the "represensting" among those many Arirang shows.

Among the numberless Arirang variants, the only one that every Korean agrees to symbolize Korean soul is ‘Seoul Arirang’. It is remade version of Korean folk song Arirang, and was used as the title song for movie "Arirang". While the movie touched people's heart by telling the story about suffering Korean people, the song soaked into people's heart, bringing up self-sympathy.

Like the movie, "Arirang Hill" also describes the harsh condition through the life of a farmer. As "Arirang" says about a poor peasant under wicked landlord, "Arirang Hill" tells the story of farmer who forfeits his lands by Japanese private moneylender. "Arirang Hill" also uses the same title song as ‘Seoul Arirang’, so the audience can feel the same self-sympathy.

After the movie "Arirang", it became a cultural trend to adapt Arirang into songs, poems, dance performances, and stage plays. Beside other forms, the stage play is much suitable for telling the story in clear and obvious way, which means the audience can get the most similar experience to watching the movie. This explains why "Arirang Hill" brings out the self-sympathy similar to that of movie "Arirang". In other words, "Arirang Hill" reconfirmed and reproduced the characterization of Arirang that the movie "Arirang" has achieved.

Now Arirang became one of Korean cultural identity. If Arirang is to remain still as national identity, continuous reconfirmation and reproduction is required, just like what "Arirang Hill" did based on the movie "Arirang". The movie "Arirang"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very beginning of the process by picking up and characterizing the folk song Arirang. "Arirang Hill" helped in sustaining the characterized figures of Arirang and spreading it. In conclusion it means "Arirang Hill" made a firm awareness of ‘Seoul Arirang’, the most popular variant of many folk songs.

서울아리랑상

연극 <아리랑고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