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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 서울아리랑페스티벌 - 서아페어워즈 - 서울아리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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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서울아리랑상Seoul Arirang Festival Awards
제2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The 2nd Seoul Arirang Award
  • 제2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 The 2nd Seoul Arirang Award
  • 일시 : 2016년 10월 14일 (금) 19:00 (Date 7pm. Oct 14th, 2016)
  • 장소 : 광화문광장 축제무대 (Place Festival Main Stage)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춘사 나운규 감독(1902~1937)을 영화 <아리랑>을 통해 시대의 노래 '아리랑'의 전국적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제2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나운규 감독이 주연, 각색, 감독한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아래서 고통을 겪던 아픈 청춘들의 애환을 그려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아리랑의 불씨를 곳곳에 되살리는 역할을 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은 개봉 직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가사가 적힌 전단지 압수로 인해 극장마다 가사를 새롭게 만들어 부르는 등 우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다른 지역 전통민요 아리랑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승된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 민요가 되어 '본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이라 명명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과 주제곡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 시발점이 되었다.

The Seoul Arirang Award is given out to a person who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 cultural value and creative dissemination of Arirang. The recipient of the Seoul Arirang Award for 2016 is Na Woon-gyu (1902-1937) who is the director and the leading actor of his films, “Arirang” that was screened at Danseongsa Theater on October 1, 1926. He is credited for popularizing the song of the époque, Arirang nationwide. The Award Ceremony takes place as part of the opening ceremony of the Seoul Arirang Festival on October 14, 2016, at 7pm.

서울아리랑상

제2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 : 나운규 감독

나운규 연혁

1902.10.27
함경북도 회령 출생
1918
룽당 명동중학교
1920
대한국민회
1923
신극단 예림회 단원
1924
부산 조선키네마 연구생
1925
영화<운영전>으로 데뷔
1926
영화<아리랑>개봉
1927
나운규 프로덕션 대표
1993
건국훈장 애국장 수상
2016
국가보훈처 10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2016
제2회 서울아리랑상 수상

이외 영화 <개척자>, <풍운아>, <들쥐>, <흑과 백>, <금붕어>,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아리랑2>, <철인도>, <금강한> 등 다수 영화 각본, 감독, 주연

서울아리랑상

최초 공개된 나운규 감독의 사진과 관련 서적
(사진제공 :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구회 상임이사)

나운규, 그리고 영화 <아리랑> Na Woon-gyu, And his film, “Arirang”

서울아리랑페스티벌조직위원회는 제2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나운규를 선정하였다. 영화 <아리랑>과 주제곡 ‘아리랑’은 영화와 음악 모두 한국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가 개봉된 지 12년이 지난 1938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아리랑이 곧 나운규’라는 공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가 전 조선의 방방곡곡을 흐르던 때는 지금부터 13년 전 일이다. ‘아리랑’이라면 라운규씨를 생각하게 되고 라운규씨라 하면 곧 아리랑을 연상한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지역의 민요 아리랑들이 보물처럼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남북단일팀의 국가로 연주되고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했던 아리랑은 다름 아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불렀던 ‘서울아리랑’이다. 나운규가 제2회 서울아리랑상을 수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영광이다.

1. 나운규의 삶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회령보통학교와 신흥학교 고등과를 나온 나운규는 민족학교 사민학교를 설립한 부친 나형권의 영향 아래 1918년 독립운동 사관학교라는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어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이후 회령-청진간 철도를 파괴하는 독립운동 ‘도판부 사건’(무산령폭파사건)에 참여하여 일제 검속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갔다. 러시아 백군에 입대해 용병으로 살았던 경험 등으로 국제성을 체득한 그는 “민족의 배애와 불타오르는 민족정신을 형상한 민족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시인 임화)

1921년 귀국해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해 다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청진과 함흥형무소에서 1년 6월의 형을 살았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독립투사 이춘식으로 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게 된다.

나운규는 1923년 출소 후, 12월 회령으로 순회공연을 위해 온 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문예부장 안종화를 알게 된다. 안종화와의 인연으로 예림회의 연구생 신분으로 무대에서 연기를 갈고 닦았다. 예림회가 재정난으로 해산된 후 서울에 온 나운규는 학업보다는 영화에 더 열중했다. 거의 매일 우미관에서 본 <명금>이나 <철로의 백장미> 같은 인기 영화의 내용을 노트에 적어놓았다가 집에 와선 새벽녘까지 변사 흉내를 내며 읽곤 했다. 1924년 안종화를 다시 만나게 되자 배우가 되겠다며 책과 이부자리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해 따라나섰다. 몇 차례 표정 시험과 카메라 테스트 끝에 그는 가까스로 한 달 11원을 받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이 될 수 있었다. 나운규는 이 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 뒤 서울 본정(충무로)에 창설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대표 요도 도라조)에 들어가 <아리랑>(1926)을 히트시켜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여기서 <풍운아> 등 4편을 만들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워 <잘 있거라>(1927),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등 5편을 감독 및 출연하였다. 그러나 1937년 8월9일 유작 <오몽녀>(1937) 등 모두 25편의 출연작과 16편의 감독 작품을 남기고 지병인 폐결핵으로 36세의 짧은 생애와 13년의 은막생활을 접는다. 그의 장례는 한국 최초의 영화인장(葬)으로 치러졌다. 그의 오랜 동료 윤봉춘이 「나운규 일대기」 (<영화 연극> 1939년 11월호)에서 회고한 그의 장례 장면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사흘 만에 상여가 집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영화인은 전부 모였다. 독립문 근처에는 어찌도 사람이 많이 모였든지 그야말로 인산인해 격이었다. 자동차와 전차가 중지되고 있었다. 행렬을 지어 상여가 가는데, 상두꾼의 소리도 슬프게 들렸지마는 악사들이 부는 처량한 나팔소리는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소학생과 중학생이 가끔 달려와서 맨 앞에서 가는 나운규의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울고 돌아선다. 홍제원 고개를 상여가 넘어갈 때는 소낙비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고개를 넘어가던 악사들은 곡조를 돌려서 나군이 옛날에 부르던 ‘아리랑’을 슬프게 불러서, 소낙비와 눈물이 앞을 가리어 걸을 수가 없었다.”

Life of Na Woon-gyu


Na Woon-gyu was born in Hoeryeong, North Hamgyeong Province in 1902. He attended Hoeryeong Elementary School the completed 2-year program at Shinheung School. In 1918, he matriculated in Myeongdong School, located in Yongjeong, North Gando of Manchuria, known as a military academy for the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But when the school was shut down because of Japanese repression, he moved to the North Gando and Manchuria regions. In 1921, he returned to Korea and enrolled in Seoul Jungdong School until he got arrested by the Japanese Colonial Police and served a year-and-a-half sentence in the Cheongjin and Hamheung prisons. While incarcerated, Na Woon-gyu was given an artist penname of Chunsa by the independence fighter, Yi Chun-sik.

After his release in 1923, he became a member of a Theater Group called Yerimhoe when he came upon a meeting with, An Jong-hwa, the Cultural director who had come to Hoeyeong for performances throughout the entire country of Korea. In 1924, after a screen test, he joined the Korea Cinema Incorporated. Soon thereafter he was acting and in 1926, when his film "Arirang" became a hit, not only did he become a well-known actor but also his career reached its peak. However in 1937, he died of tuberculosis, bringing closure to his 13-year career in film, thus leaving behind him a total of 25 films in which he took part as an actors, 16 films that he directed, and a posthumous work, Omongnyeo that was released on August 9, 1937.

2. 영화 <아리랑>

영화<아리랑>은 부산 소재 영화사 조선키네마사가 제작하고 나운규가 감독, 주연, 시나리오, 각색을 맡아 단성사에서 1926년 10월 1일에 개봉하였다. 35mm 흑백무성영화(전9권)로 여주인공 신일선, 변사 성동호, 막간 여가수 유경이(劉慶伊)가 참여하여 큰 흥행을 거두었다. 개봉일 새벽 총독부가 전단지 1만장에 불온한 가사가 있다고 문제 삼아 모두 압수하는 등 탄압을 했으나 서울의 15개 극장, 전국 30여개 극장 상영을 시작으로 기록상 1946년까지 서울에서만 800여회나 재상영되었다. 또한 내용일부가 삭제된 상태이긴 하지만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 동포사회와 일본의 조선인 노동현장 가설극장에까지 상영되었다.

서울에 유학 갔다 실성하여 고향으로 돌아 온 청년 영진이가 아들의 성공만을 기대하고 사는 아버지와 순박한 누이동생(영희/신일선)이 일제의 토지수탈로 지주와 그 앞잡이들의 횡포가 구조화 된 상황에서 곤경을 겪는 내용이다. 여기에 개와 고양이를 첫 타이틀로 제시하여 조선과 일제의 관계를 현실화 하고, 수난의 땅에서는 살수가 없어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고발했다. 그래서 관객 모두는 이를 ‘나의 이야기’로 공감과 공분으로 받아들여 볼 수밖에 없는 영화로 열광했다. 그런 결과로 1940년대 초 조선영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1960년대 남북 공히 영화<아리랑>을 ‘민족영화’로 꼽게 되었다.

미국 인터넷영화잡지 ‘필름스레트닷컴’(FilmThreat.com)‘은 2008년 1월 ‘잃어버린 영화 중 가장 흥미로운 10편’을 선정·발표했다. 사이트는 2008년 신년 특집으로 기획된 이 선정에서 한국영화 아리랑을 10편의 영화 중 가장 먼저 소개했다.

한국영화의 기초를 닦은 흑백 무성영화인 <아리랑>은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직접 본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아 ‘전설의 명작’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 1세대 영화 중 하나인 <아리랑>은 일본의 식민지시절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가 담겨있는 영화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아리랑은 한국전쟁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의 수집가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며 “당시 많은 한국 영화들이 그렇게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Arirang, The Film


Na Woon-gyu's film, "Arirang" was produced by Busan-affiliated Korea Cinema Incorporated, directed by Na Woon-gyu, and premiered at Danseongsa Theater, Seoul on Ocotober 1, 1926. The director wrote the screenplay and also starred in the film. Shot in 35mm film, it was a black and white silent movie, presenting Shin ll-seon as the female lead, Seong Dong-ho as the (silent film era) narrator and Yu Gyeong-i, the interlude female singer; the movie was a huge box-office success. On the morning of the film premier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nfiscated 10,000 leaflets with the accusation that in contained subversive lyrics; however, the film was screened at 15 theaters in Seoul and 30 places around the country. The records indicate that "Arirang" was shown eight hundred times until 1946. In addition, even though parts of the film had been deleted, it was exported to Japan as well as being screened at make-shift theaters in the places where many Korean laborers lived in concentration camps and also to the Korean residents in China.

The film, "Arirang" is about the adversity that a Korean family undergoes when they are subject to the deprivation of their land by the landowners and croni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sm period. The story centers around a young mans, Yeoung-jin, who returns to his hometown, having become mentally deranged in Seoul where he was attending school; his father, whose only purpose in life is to see his son become successful, and Yeoung-jin's innocent and good-hearted younger sister, Yeoung-hui. The film also delineates the relationship of Korea and Japan by analogizing it to that of a dong and a cat in the beginning. It shows how the Korea people were forced to leave their home country for faraway places like North Gando, China because of the unbearable suffering and ordeal in Korea. The movie allowed everyone in the audience to whole-heartedly empathize with the story. Consequently, in the 1940s it was chosen as the best film in the history of Korea cinema and viewed as a "national film" by both North and South Korea.

Although the black and white, silent film, "Arirang" paved the way for Korean cinema, there remain very few people who have seen it today; hence, it is referred to as legendary masterpiece. "Arirang" a film from the first generation of cinema work, is described as an expression of the Korean people's courage against tyrann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sm. Rumor has it that a collector in Japan has a copy of the film, although it is said to have been destroyed during the Korea War along with many other Korean films that have perished.

서울아리랑상

'아리랑' 촬영 때의 스태프들 (중앙 어린이 안고 있는 나운규)

서울아리랑상

영화 <아리랑>포스터

3.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은 영화보다 앞서 전국적으로 유행을 했다. 영화에서 주인공과 동리 사람들에 의해 일부 가사로 네 번이 불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인 아리랑고개에서의 합창은 영화의 주제를 각인시켜주었다.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이가 포승에 묶여 일본 순사에 호송되어 갈 때 주인공이 뒤 따르는 동리사람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대신 우리가 함께 부르던 ‘아리랑’을 불러 주십시오.”라고 해 대합창이 이뤄진다. 이 때 이미 네 번이나 들어 그 곡을 거의 외운 관객들이 모두 울며 따라 불렀다.

나운규는 생전 인터뷰에서 ‘아리랑’을 만들게 되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울림을 남겨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어 보았답니다. ​(......)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내 가사를 쓰고 악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당시 극장 단성사 소속의 변사이자 감독, 작사⋅작곡자이기도 한 김영환이 나운규의 의뢰에로 편곡(편작)했고, 가사는 처음 총4절이었으나 일부가 삭제되어 부르지 못하게 되자 상영 극장마다 새로운 가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은 기존의 지역 전통민요 아리랑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북한이나 해외동포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널리 부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이 되어 ‘서울아리랑’ 또는 ‘본조아리랑’이라고 명명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운규와 영화<아리랑>은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시발점이 되었다.

“영화 <아리랑>의 성공으로 아리랑은 기존의 아리랑에 활력을 주어 동반상승 시키고, 주요 장르의 작품에 파급돼 전 민중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이로부터 아리랑은 민족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하고,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하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로 역할을 했다. 바로 ‘아리랑’은 민요, 노래 그 이상의 노래가 된 것이다.” (김연갑, <나운규 영화 ‘아리랑’이 낳은 본조아리랑>, 시사저널, 2013)

The theme song the film, "Arirang"


"Arirang" the theme song of the film, has been passed down to the present day in a completely different manner from the traditional folk Arirang songs of various regions. As a result, the theme song from the film has come to be knows as the definitive version of Arirang, beloved in North Korea and by Koreans living abroad, as well as foreigners. It is even referred to as "SeoulArirang" or the "OriginalArirang".

It is in this vein that Na Woon-gyu's film, "Arirang" can be said to have led to Arirang being the national song of Korea. As a result of the success of the film, Arirang augmented the existing Arirang songs and played a crucial role in important genres of artwork, thus making it an integral folk song.